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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69)한국전쟁 순교자 정읍천원제일교회 박영기 장로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6.25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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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본지논설위원)

정읍시 입암면 천원리에는 1904년 4월 천원제일교회가 설립되었다. 입암면은 내장산 톨게이트를 나와 장성방향으로 가다 보면 있다. 입암면은 방장산과 입암산(笠岩山 633m)을 배경으로 한 아름답고 인심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날 왜구들이 전라남도 바닷가로 침범하여 이곳까지 들어올 때 입암산성을 쌓았는데, 이 산이 삿갓 모양이어서 그때부터 입암산이라 불렀고, 그 산 아래는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그 중심에 천원리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장성에서 재를 넘어 오면 이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하룻밤을 자는 숙소가 있던 곳이다.(전병호 목사 글 인용) 최중진 조사(후에 목사)가 이곳에서 머물며 전도를 하여, 주민인 서영선, 박창욱, 박성숙, 이공숙 등이 중심이 되어 1904년부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차츰 교인 수가 늘어나자 14칸 교회당을 신축하고 박창욱이란 청년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당시 천원에는 100호 정도의 초가집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중에서 큰 집으로 교회가 우뚝하니 서 있어서 교인들은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교회가 부흥하는 데는 성자의 삶을 산 좋은 지도자들이 있었다. 첫 교인 서영선은 본래 술주정뱅이에 노름꾼으로 세월을 보내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복음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란 평판을 얻게 되었고 존경받는 장로가 되었다. 또 한 1923년 철원에서 이사 온 박영기(1877-1950)에 의해서다. 그는 강원도 출신으로 무당에게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천원으로 이사 온 뒤 인근 평야에서 나오는 쌀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여 사들였다가 서울에 가서 팔아 거부가 되었다. 정읍지역에서 매계교회의 박봉래, 제일교회의 정종실과 함께 박영기, 이 세 장로는 부호로 이름을 날리며 교회를 섬겼는데, 천원교회는 박영기 장로의 영향으로 한때는 600명이 넘는 큰 교회가 되기도 했다. 박영기 장로의 부인 안덕신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당시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한 자녀들을 위하여 천원학원을 설립하여 중등교육을 시켰고, 이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 못 하는 학생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여 전주의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하는 등 교회의 어머니 역할을 하였다. 박 장로 부부는 6km 떨어진 소성면 두암마을에서 출석하는 가난한 청년 김용은과 김용칠을 격려하고 돌봐주어, 그 후에 성결교단 총회장이 되었다.

박영기 장로는 신사참배를 반대해 50일간이나 경찰서유치장에 수감 되었었고, 한국전쟁 시에는 교회를 지키던 강해주 전도사와 함께 인민군에게 끌려가 그해 9월 28일에 인민군의 총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입암면 하부리 부락 언덕에서 청년들 50여 명과 함께였다. 이때 박영기 장로는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도 인민군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이 민족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눈을 감고 주님의 품 안에 안겼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만든다.” 박 장로 내외의 헌신은 교회를 부흥시켰고 사역자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천원 제일교회는 면 단위 교회이지만 한국교회의 모델이 되는 건강한 교회이다. 글로벌시대에는 시골이라도 여천 애양원(손양원 목사), 신안 증동리교회(문준경 전도사)처럼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박기석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박영기장로의 열매 김용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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