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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40)비밀의 숲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5.27 17:56
  • 호수 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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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작가(본지논설위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비밀의 숲을 지인 덕에 알게 되었다. 명성은커녕 소문도 없이 조용하게 존재하는, 연세대캠퍼스 내에 있는 삼애교회 숲이다. 아파트 사이의 좁은 길을 올라가니 넓지 않는 입구에 철망으로 되어 있는 문이 높다랗게 자리하고 교회 팻말이 보였다. 아무도 그 안에 숲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입구였다. 철망문 한쪽이 열려 있었고 그 문을 들어서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꽤 넓은 찻길인데도 도열하듯 서있는 느티나무의 그늘이 벌써 울울했다. 인조잔디가 멋지게 깔린 야구장과 축구장이 시원스레 펼쳐지고 교회는 그들을 지나 높은 위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예배당은 배민수목사의 기념관도 겸하고 있었다.
 오월의 싱그러운 햇살이 가득한 날이었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숲길은 적막해서 깊어보였고 고요해서 아름다웠다. 아카시 꽃이 한껏 피어나 이곳저곳에서 향기가 뿜어져 오니 천상의 화원이 따로 없었다. 비아도로사에서 유래한, 어떤 설교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간결한 그림과 말씀 묵상 길이 있었다. 바로 곁에 안곡습지라는 큰 공원이 있고 고봉산과 이어져 있는데도 그렇게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이즈음 자주 산책을 가곤 하는데 그러다보니 저절로 배민수목사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의 부친은 나라 사랑하라는 유언을 남긴 독립 운동가였다. 미국 유학 후 배목사는 장로교 총회 농어촌부 초대 총무를 역임했다. 농민학교를 세우고 ’농민생활‘이라는 잡지도 간행하면서 어려웠던 시절 농민의 삶을 개량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기저 사상이기도 한 삼애 정신은 하나님 사랑 농촌사랑 노동사랑이다. 1967년에 일산에 삼애농업기술학원이라는 공동체를 설립해 농업과 말씀을 가르쳤다. 1976년 별세 후 그의 유족들은 재단법인 삼애농업기술학원과 일체의 재산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하면서 약 5만 5천평 규모의 연세삼애 캠퍼스가 조성되었다. 1980년에 배민수기념관과 천문대를 건립하였고 2000년에 체육시설을 조성하였으며, 2006년에는 배민수기념관에 삼애교회를 창립하였다. 최근 이 비밀의 숲에 ‘영구적인 교육 및 학술기금 확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건설 추진 건이 진행되고 있었다. 연세삼애 캠퍼스는 나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도 적절하게 사용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야구장이나 축구장은 볼 때 마다 텅 비어 있었고 아는 사람들 소수의 놀이터였다. 기증의 목적인 농촌사랑이나 노동 사랑을 위해서도 도심 귀퉁이에서 원활하게 이루어갈 방법은 없어보였다. 농업과 노동에 대한 개념이나 그 방법도 달라진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현재 무용지물인 이 땅을 이용해서 교육이나 후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사용법이 아닐까, "아파트 건설은 배 목사님의 유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면서 "삼애농업기술학교와 농업개발원 졸업생들도 반대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 또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그렇다면 하나님 사랑 농촌 사랑 노동 사랑이란 뜻 아래 기증된 <선의>를 어떻게 해야 이룰 수 있을까,
 이젠 푸나무를 생명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식물의 세계에 조금만 들어서면 식물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참말 경외심조차 생겨난다. 이즈음 백당나무 꽃이 피어난다. 실제 꽃은 꽃 같지도 않는 작은 모습이라 그런 자신을 잘도 알아서 나비와 벌을 모으기 위하여 주변에 헛꽃(浪花)인 하얀 꽃잎들을 만들어낸다. 벌과 나비는 이런 헛꽃을 보고 달려들고 이 찬스에 백당나무는 수정을 한다. 산수국도 마찬가지다. 무성한 잎 아래서 꽃이 피어나는 다래나무는 한 수 더 뜬다. 잎에 가려서 꽃이 보이지 않으니 이파리 자신이 꽃처럼 하얗게 변해서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아주 오래 전 엄마의 텃밭에서 들은 이야기 하나 “ 아야, 이 풀 봐라, 이것이 봄에는 엄청 크게 자란 뒤에 꽃이 피어난디 이라고 늦은 가을에 나오믄 땅에서 솟아나자말자 꽃을 피어야, 살날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아는 거제, 그래서 얼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하는 거여.” 눈물겹지 않은가,
 사람들 사이의 <선의>는 그 단어가 지닌 아름다움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무수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동편의 선의는 서편에서 보면 악의가 될 수 있다. 시작은 선의였다 할지라도 그 끝도 선의 일수는 없다. 당연히 타인의 선의가 나의 선의일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변화되어가는 시간 속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무서운 자본주의 시대에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일까, 기도길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나무들아, 이 땅에서 오래 산 너희들이 이 땅의 주인이란 것을 나는 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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