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0.10.21 수 21:28
상단여백
HOME 교회 탐방
교회탐방/강경성결교회102년 역사...최초 항일운동 발상지
  • 하문수 대표기자
  • 승인 2020.04.30 16:49
  • 호수 479
  • 댓글 0
              강요한 담임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강경교회(강요한 목사)는 1918년 10월 18일 경성성서학원에서 수학한 평안남도 평원출신 정달성(鄭達成)전도사가 한국 동양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강경에서 사역하면서 개척된 교회다.
일본 동양선교회(OMS)는 미국 선교사(카우만, 길보른)들의 선교정신에 의해 노방전도, 축호전도를 통해서 구도자가 모이면 초교파적으로 거주지에 있는 기존교회에 출석하도록 권하는 순수 복음전도 방식이었다.
최초 4중복음의 교리로 한국에서 전도사역을 시작한 정빈과 김상준 전도자 역시 미국선교사들의 뜻에 따라 서울에서 경성복음전도관과 경성성서학원을 설립하여 운영했으나 지역교회설립과 교단 조직은 관심 밖이었다.
경성성서학원에서 졸업생이 배출되자 전국지역으로 분산하여 전도하게 되었고, 지역에서 교회를 설립하는 숫자가 점차 늘어나 필요에 의해 조직구성을 하면서 한국성결교회가 교단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국성결교회가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하게된 것은 경성성서학원 학생들이 부여  규암에서 여름 수양회를 개최한 것을 인연으로 하여 지역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하려는 토양이 있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특별히 1911년 11월경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강경역이 개설되었고,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교통이 원활해서 도시화가 이뤄진 것과, 해상과 육로를 통해 왕래가 활발하고, 넓은 평야에서 생산된 다양한 농산물과 강경포구를 통한 해상운송 및 어업이 발달하여 풍부한 경제상황이 포교활동에 유리하여 선교지로 적합한 곳이라고 판단했다.
강경에는 1896년부터 침례교회와 감리교회 그리고 구세군 선교사들이 이미 교회를 설립하였고, 포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터라 포교하기에 편리한 지역이여서 교회개척을 결정할 수가 있었다.
강경은 논산과 김제평야의 물류중심지며, 군산으로 곡물 등을 해상으로 운송하기에 용이하여 일본으로 나르는 거점도시 인데다가 육로를 통해서 논산, 부여, 규암, 은산, 홍산 등지로 인력거나 자전거 또는 말을 이용한 운반수단과 강경포구에서 나룻배를 이용하여 여러 곳으로 이동수단이 용이했던 곳이다.

 

1. 강경교회 설립 동기
일본 동양선교회가 초대 한국감독으로 파견한 영국인 존 토마스(Jhon Thomas)선교사와 미국인 어네스트 길보른(Ernest Albert Kilbourne)선교사 그리고 김상준 과 박제원 전도자가 규암으로 가기위해 강경역에 도착하고 보니 밤이 되었다.
강경역 뜰에서 길보른 선교사는 밤 시간을 이용하여 사중복음에 대한 설교를 하게 되었고, 설교를 듣기위해 모여든 100여 명 중 감동받은 30여명의 신자들이 교역자파송을 요구하자 당시 규암(1913년)과 은산(1914년), 그리고 홍산(1915년), 금천(1916년)에 연이어 복음전도관을 세웠던 터라, 경유지였던 강경에 정달성 전도사를 1918년 10월에 파송하고, 강경복음전도관(현 강경성결교회)을 설립하게 된다.
 
2. 토마스 선교사의 희생
한국 동양선교회 초대 감독인 토마스 선교사가 통역사인 이장하 목사와 함께 1919년3월 20일 강경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피기 위해 뒷산 옥녀봉으로 향하던 중 산 정상에서 독립만세소리가 나고 4-5명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내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일본경찰과 헌병들이 토마스 선교사와 이장하 목사 그리고 정달성 전도사를 체포하고,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주동자로 오해하여 심하게 구타하고, 일본인 30여명도 합세하여 무조건 폭행하게 되자 심한상처를 입고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진다.
일본법원의 재판결과 영국 대리총영사 로이드의 도움으로 무죄를 받아 배상금 5만 불을 받아서, 그중 일부를 강경교회 건물매입자금으로 헌금하고,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1920년 2월 토마스 선교사는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3. 백신영 전도부인 신앙의 열매
강경교회초기 백신영 전도부인이 김복희 선생과 같이 주일학교 학생들을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천국 그리고 애국사상을 중점 교육한 탓에 항일정신은 물론 일본군의 우상인 신사찬배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당시 강경교회 주일학생 57명이 백신영 전도부인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를 하였고, 윤판석 학생(한국성결교회 평신도지도자)은 일본인학교 교장 앞에서 일본역사교육을 거부하며 투옥까지 되면서 믿음으로 신앙을 지켰다.
그 후에도 강경교회는 오영필, 이헌영 목사 등이 일제식민 반대투쟁과 6.25전쟁의 민족수난기에 기독교신앙을 지켜낸 훌륭한 애국자지사들이 있었기에 강경교회가 기독교 신앙정신에 의한 순교신앙의 성지로 전국교회에 알려지게 된다.
백신영 전도부인은 일찍 과부가 되었고,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후 정신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3.1운동,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창설, 일제형사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후 강경으로 내려와 주일학교교육을 담당하고, 신사참배반대운동과 경성성경학원 여자사감으로 제직하며, 전국부인회 창설, 성결교회 여 교역자회 창설, 한국YWCA 창설 등에 가담하였고,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를 제자로 양육했다.
 
4. 강경이 성지인 사실증명
일본이 1920년부터 전국주요도시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운동을 전개하면서, 서울에는 신궁을 만들었고, 곧 이어서 강경이 주요물류도시로 옥녀봉에 신사를 짓고, 참배를 강요할 계획으로 매일준비예식을 거행하고 있었으나, 강경교회 백신영 전도인을 비롯한 주일학생들과 강경보통학교 김복희 선생이 이끄는 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신사참배거부가 거세지자 이 소문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강경교회가 중심이 되어 강경시민들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번져 일본국이 강경에 설치하려던 신사를 설치하지 못하고, 차후로 미루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강경교회는 어린이부흥을 통해 그 부모들까지 교회에 출석하여 크게 성장했으며, 기념비적인 예배당을 특수공법에 의해 한옥으로 짓고 지금까지 국가문화제 보존 건물로 존치되고 있다.
지금도 강경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녀봉에 올라가보면 인구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도시에 매머드 급 교회건물들이 도처에 있고 장, 감, 성, 침례, 구세군, 천주교까지 다양하게, 기독교성지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어, 1년에 성지순례 객이 2만여 명씩 방문하고 있으며, 그 유명한 강경 젓갈은 전국적으로 공수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본지가 창립100주년 이상 된 역사교회탐방에 바쁜 일과 중에도 손수안내를 맡아 수고해주신 강경성결교회 강요한 담임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문수 대표기자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하문수 대표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