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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61)한국전쟁 순교자 팔과 눈을 잃기까지 독립운동한, 윤형숙 전도사(1900~1950)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4.09 16:40
  • 호수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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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본지 논설위원)

독립운동가 윤형숙은 전남 여수 화양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윤치운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박씨 부인을 얻었는데 여기서 두 딸을 얻었는데 큰딸이 윤형숙이다. 아버지는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했고 윤형숙은 일곱 살 무렵 새어머니를 맞아야 했다. 형편이 어려워진 윤치운은 먼 친척 윤성만(전북 남원 동북교회 장로)에게 자매를 보냈고 윤형숙은 여기서 귀하게 자라며 복음을 접했다. 윤성만은 윤형숙을 순천선교부 프레스톤(변요한) 선교사에게 보내 은성학교(현 순천 매산중학교) 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은성학교는 그녀에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다. 1916년 일제의 탄압으로 은성학교가 폐교하며 윤형숙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선교사의 주선으로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가게 된다.

당시 수피아학교는 남궁혁 목사의 부인 김함라와 그녀의 동생 김마리아, 조카 김필례 그리고 열사 박애순 교사 등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이 학생들을 지도했다. 윤형숙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박애순 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들고 수피아여학교 교정에서 발원한 광주지역 만세운동에서 그녀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봉에 섰다.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날에 윤형숙은 그만 왼팔을 잃는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체포된 그녀는 혹독한 고문으로 오른쪽 눈까지 실명하며 4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형기를 마친 후 4년간 일본 군부대에 유폐를 당하기도 한다. 이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 윤치운은 상심한 나머지 그만 몸져눕고 세상을 떠난다. 출옥 후 윤형숙은 함경도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후 전주 기전학교 기숙사 사감직, 고창읍교회 유치원 교사직 등을 거친 후 1939년 고향 여수로 돌아와 여수제일교회에 출석한다. 그는 여수제일교회 전도사로 봉산 예배당과 창무리 예배처(산성교회:통합) 등을 순회하며 구령에 힘썼다. 윤 전도사는 교인들에게 처음에는 신체 불구로 인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나중에는 독립열사라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1948년 여순사건으로 윤형숙 전도사는 신변의 위협을 받았지만, 고향 씨족사회가 그를 지켜냈다. 하지만 1950년 9월 조카사위가 있는 여수 금오도 심포리로 피신했다가 반공 인사로 인식되어 온 그녀를 내무서원들이 체포하고 말았다. 28일 여수경찰서에 수감 되어 있던 기독교인들과 우익인사들은 끌려갔다. 좌익에 의해 손양원 목사와 함께 200여 명이 여수 미평골짜기 과수원(현 둔덕동 여수새중앙교회 옆)에서 무참히 살해됐다. 그렇게 윤형숙은 손양원 조상학 지한영 등과 함께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 4월 15일 여수제일교회 성도들은 그녀의 묘소에 순교기념비를 세우고, 2004년에는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며 윤형숙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애를 기렸다.

여수제일교회는 1910년 설립된 교회로, 초창기부터 애국신앙을 가슴에 품은 목회자들이 강단을 지키며 성도들을 이끌었다. 김순배 목사는 두 차례 옥고를 당했고, 김은기 집사는 순교, 교회당 건축에 순직한 김선영 목사, 광주신학교 교장을 지낸 박종삼 목사, 교단 총회장으로 섬긴 정성규 목사 등 귀한 헌신자들이 순교의 길을 뒤따르고 있다.

순교자 윤형숙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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