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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 선 박사의 창문 칼럼(7)유관순 열사, “신앙의 투사·순국열사”로 신앙 승화
  • 최 선 박사(Ph.D., Th.D.)
  • 승인 2020.03.24 11:53
  • 호수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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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 선 박사(Ph.D., Th.D.)

-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금년은 1919년 조국 독립을 위해 전개되었던 3.1운동이 일어 난지 101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대한제국이 외세들에 의해 풍전등화와 같이 혼란한 그때에 일본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하였다. 식민지가 된 대한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애국운동을 하였던 많은 독립 운동가들 중에 유관순 열사를 소개한다.

유관순은 충청남도 천안 병천(아우내)의 선비 가문에서 3남 2녀 중 차녀로 1902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녔으며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공주 영명학당에서 수학하고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다녔으며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16세 때 3.1운동사건으로 조국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 유관순은 기독교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졌으며,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유관순 누나’라고 친숙하게 불리고 있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선비 출신으로 일찍이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고 홍호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로 귀의하였습니다. 그는 조병옥의 부친 조인호와 함께 교회를 중심으로 민족계몽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자란 유관순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어느 날 유관순의 고향 용두리 마을 지령 부락에 지방 순회 전도하던 미국 여선교사 앨리스 샤프(Alice Hammond Sharp)가 찾아왔고 샤프 선교사는 자신의 눈에 띈 어린 유관순을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도록 인도하였다. 당시 유관순은 학교생활에 매우 헌신적이며 모범적인 학생으로 소문이 났다.

1919년 3.1운동이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일어났다. 당시 유관순은 16세로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기숙사에서 3.1독립만세 소리를 듣고 그냥 있을 수 없어 나가려는 유관순을 기숙사 사관이 학생의 신분으로 참여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적극 만류하였다. 그래도 뒷담을 넘어 만세시위에 참가한 유관순과 친구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지만 학생 신분이었기에 곧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이화학당은 폐쇄를 당하였다.

이화학당의 폐교로 고향 천안으로 내려간 유관순은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천안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파고다 공원의 만세사건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관순은 교회를 찾아다니면서 이 사실을 알렸고, 동네를 다니면서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때 어린 유관순의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조병옥의 아버지 조인호였다.

유관순은 지방 유지들의 뜻을 모아 4월 1일(음력 3월 1일)을 독립운동의 거사 날로 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유관순은 사촌 언니 예다와 함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산을 오르내리며, 목숨을 걸고 청주를 비롯한 청원, 연기, 진천 등 각 지역을 찾아가서 알렸다.

거사 날인 음력 3월 1일 정오, 아우내 장날에 3천여 명이 모였다. 조인호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은 독립 연설을 한 다음에 “대한민국 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일본 헌병대가 급히 출동하고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유관순의 오빠 유관옥도 함께 경찰에 붙잡혀 갔고, 유관순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유관순은 “한국인이 어찌 왜인의 재판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항의하여 3년형으로 감형을 받았으나 다시 법정에서 재판 거부와 항변하였다하여 법정 모독죄를 추가하여 7년형이 내려졌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이후에도 그곳에서 매일“독립만세”를 불렀고, 이화학당 은사이신 박인덕과 어윤희를 만나서 다시 의기투합하여 옥중투쟁을 하였다. 감옥에서 날마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유관순은 간수에게 갖은 폭행과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1920년 10월 12일 16세의 유관순은 잔악무도한 간수의 폭거에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유관순의 죽음을 알게 된 이화학당이 시신을 요구하였으나 일제 당국은 자신들의 잔인함이 탄로되는 것이 두려워 거부하다가 이화학당 교장 월터(F. Walter)가 국제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경론을 펴자 시신을 돌려주었다.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유린당한 유관순의 시신을 이화학당에서는 정성스럽게 수습하여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3.1독립운동 101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신앙의 조상들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 유관순 열사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 독립운동을 위하여 ‘신앙의 투사’, ‘순국열사’로서의 생애를 살았다. 유관순 선생은 한국 역사와 기독교 역사 속에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대적인 인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선조들의 나라사랑을 본받는 국민들이 되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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