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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자녀들지혜는 소유가 아닌 존재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3.18 17:47
  • 호수 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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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교 교수,예수말씀연구소 소장)

Q 누가 7 : 35 “그러나 지혜는 그의 자녀들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지혜를 소유의 차원에서만 이해하지만, 지혜는 존재의 차원에 속하기에 그 의미가 사뭇 심원하다는 뜻으로 말씀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란 책에서 “진보가 우리의 행복을 대신해주지 못하며 인간 스스로의 신뢰와 초인간화는 결국 비인간적인 인간을 낳는다.”라고 신랄하게 현대인을 비판한다.

지금 한국교회는 진보의 논리가 사회 전반에 팽배한 틈을 타서 동성애, 이슬람, 주사파, 세습반대 대책에 대해서 성서가 가르치는 원리를 들고 나오는 영적인 지도자를 향해서 ‘꼰대’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 ‘빤대’가 많고, 교계에서도 그 변변한 권세와 직함을 유지하려고 밥그릇 지키기에 급급한 정치꾼 교권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지혜는 그의 자녀들에 의해서 정당화 된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지혜는 분명히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혜를 소유하려고하는 생각을 버려야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결코 그는 지혜를 소유한 왕이 아니었다. 솔로몬의 재판은 지혜를 소유했기 때문에 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임재 함으로 지혜로운 왕이 될 수 있었다.

‘존재용어가 소유용어에 앞서며 더 근본적인 것’이라고 프롬은 말한 것을 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 존재하게 된 것이지, 결코 삶을 소유한 것이 아니며, 삶은 인간 존재에 주어진 선물이고, 지혜도 인간 존재에 주어진 선물이기 때문에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누리는 은총이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떨어진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인근의 척박한 광야에 거주하면서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처럼 살아갔지만, 사실상 그의 삶이 보여주는 존재방식은 철저히 하나님의 임재 속에 있던 삶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존재방식으로 성육신하신 분이시다. 야고보서 4:8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예수께서 이미 지혜의 자녀로 사람들이 누리는 존재방식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유일한 분이라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실로에 가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제단의 형태를 볼 수 있다. 흔히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지성소와 성소 앞의 성막 뜰에서 제사를 드렸다. 다시 말해서 무거운 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까지 대비하여 비스듬하게 경사로를 만들어서 제사에 쓰일 제물을 손수레로 이동하여 끌고 올라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잠언 1:21-22는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라고 한다. 흔히 지혜를 찾지만 오히려 지혜가 말을 걸어온다.

Q는 지혜 기독론을 기초로 예수와 세례 요한을 지혜의 자녀들로 이해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거론되고 있다. 지혜를 예수로 이해하게 될 때 차이점이 있다면 요한은 ‘회개를 위한 세례’를 설교하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할 것을 설교하셨기에 회개하는 자가 이미 지혜를 누리는 자이다.

지성소와 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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