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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32)이 또한 지나가리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3.04 17:41
  • 호수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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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영 작가   (본지 논설위원)

사실 그 장면은 매우 비현실적이었어. 마치 영화 속 CG처럼 보였지, 수년 전 일본의 쓰나미 말이야,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사람 사는 곳으로 밀려들어오던 물, 그 고요하던 바다가 그렇게 무섭다니, 저렇게 힘이 세다니, 길지 않는 그 화면을 자꾸 돌려 봤어, 몇 분 사이에 물의 세상이 되어버리는 기이한 모습을 보며 노아의 심판이 생각나기도 했어, 하지만 그 때는 비 내리는 시간이라도 있었지, 쓰나미는 삽시간에 세상을 초토화 시켜버리더군,
 아침마다 머그잔에 우유를 반잔쯤 담아 전자레인지에 2분20초가량 따끈하게 데워 커피를 넣어 마시곤 해, 딱 스벅의 돌체라테 맛이지, 한번은 옷깃에 스쳐 엎질러졌어. 바로 곁에 있는 책을 적시고 순식간에 책상 아래로 흐르며 서랍을 지나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세상에 그 사이에 서랍 안으로까지 스며들어가, 컵 안에 있을 때는 몇 모금 되지도 않는 우유가 제자리를 벗어나니 얼마나 많은지, 처리하기가 얼마나 복잡한지, 그럴 때마다 <질서>를 생각하곤 해. 바다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해변까지만 다가온다는 것이 아름다운 일인가, 태양이 저기 있고, 지구가 돈다는 것이 그래서 아침이 되고 조금씩 계절이 바뀐다는 것이 그 질서는 얼마나 아름답고 그윽한 일인가,
 아픔이나 고통은 질서를 벗어나 있는 걸까? 아니면 질서 속에 아픔이나 고통도 공존하는 것일까? 언니, 잠깐씩 잊을 때도 있지만 마치 목에 무엇인가가 걸린 것처럼 다시 또 언니를 생각하곤 해, 언니는 지금 어디쯤서 살고 있는 것일까? 언니의 눈빛을 보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때는 슬퍼 보여, 왜 하필이면 언니가 아플까, 내가 알기로 사람들 가운데 언니처럼 착한 사람 없는데, 신앙생활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 왜죠? 슬며시 언니 아픔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가져가기도 하지, 모든 생사화복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언니가 내 언니만 아니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 뜻이 있을 거예요’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 거야, 근데 언니라 그게 잘 안 되는 거지, ‘하필이면’ 이런 단어의 한계도 알아, 마치 다른 사람은 아파도 괜찮다는 뉘앙스가 있잖아, 좋을 때는 왜 <하필이면> 나를, 하지 않으면서 나쁠 때는 꼭 ‘하필이면’을  하거든, 똑 같이 사용해야 맞는 거 아닌가?
 헤아릴 길 없는 세상사 속에서 욥을 묵상해, 욥은 우리의 삶 속에서 치러야 하는 고통을 모두 치룬 사람이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을 읽다보면 차라리 침묵하지, 그냥 손이라도 잡아주고 말지, 생각이 저절로 들어와,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 어찌 저리 차갑고 냉정할까, 마치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서 확인하는 도마를 그린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말이지, 어쩌면 언니의 아픔 앞에서 사람들도 욥의 친구처럼 언니의 삶을 헤아릴지도 몰라, 죄의 분량이 고통의 양이 아닌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는데도 계산을 한다는 말이지, 처음에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며 온화하던 욥도 점차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가, 왜? 하필이면 나죠? 내가 왜요? 見神할 때 까지 말이지, 見神은 욥의 회개를 불러오고, 회개는 침묵이 되지,  어쩌면 언니는 이미 견신의 길에 서있는지도 몰라, 나는 지금 見神하기 전의 욥의 시간 속에 있고,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사일런스’라는 영화가 있어.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영화화 했는데 17세기 일본으로 온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이야기야. 자신의 고통보다 주를 믿는 순박한 사람들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배교하는 선교사가 주인공이야. 일본 재판관은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볼모로 잡고 ‘너희가 진리라고 믿는 신념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이 하느님이 뜻이냐"고 몰아세우면서 "배교하라. 네 영광의 대가는 저들의 고통"이라고 말하지. 나라면 어떨까,  칼빈은 고난은 하나님이 보내는 메시지라고도 했어. 고난가운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섭리를 깨닫게 된다고, 물론 고난이 내 것일 때 잘 와 닿지는 않지, 하지만 이즈음 아픈 언니가 나의 교사가 되어서 내게 섭리를 가르쳐 주고 있네.   
 나는 가끔 수십억 사람의 얼굴이 전부 다른 이 놀라운 사실이 우리의 삶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많은 키를 쥐고 있다고 생각해. 문제도 그렇게 다를 것이고 답 역시 다를 거라는, 고통과 해결책도 다르고 살아가는 모습과 믿음의 결도 다르지 않을까, 그러니까 모든 인생들은 자기만의 방법으로 살아가고 죽는 거야, 외로운 여정이지,  
 온 세상이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해 난리야, 정말 흉흉한 세상이 되었어.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동토의 시절이 이어질지도 모르겠어. 자유롭게 예배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묵상하는 시간으로 만들어야겠지,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 인생의 끝을 생각하며 성숙해지는 시간으로 삼는다면 그 또한 다행일 것이고,
 이 또한 지나가겠지. 봄이 되어 꽃이 피면서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도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겠지. 그러고 보니 예배는 우리 삶을 지키는 질서이며 천칭이네. 잠깐이길 간절히 기도해.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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