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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29)비행기보다 무궁화호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2.12 18:15
  • 호수 472
  • 댓글 3
   위 영 작가  (본지논설위원)

그대는 좀 생경할 수 있겠군요. ‘여행=글’ 이라는 제 공식이 말이죠. 난데없는 연결로 여길 수 있겠지만 내겐 한 자릿수 더하기처럼 선명해요. 가끔 오래전 여행을 다녀와서 쓴 글을 보면 전혀 새로운 나와 새로운 여행지가 거기 있어요. 분명 난데 내가 아닌 나를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수년 전에 다녀왔던 구채구를 다시 내 글속에서 만날 때 그 놀라운 물의 장관이 제 방 책상 앞에서 선명히 펼쳐지더군요. 여기서 그랬던가? 거기서 그런 생각을 했던가? 글을 읽으며 약간 쑥스러우면서도 영롱한 기쁨 같은 게 솟아나더군요. 영롱한 기쁨을 그리움으로 바꿔 읽으셔도 되요. 돈 안 드는 새로운 여행을 내 글속에서 다시 더 깊게 하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겨울은 그 어느 계절보다 솔직한 시간입니다. 나무들은 회초리가 되어 산의 갈기로 자리 잡고
산그리메는 산의 갈기로 인하여 더욱 선명해져 있어요. 푸나무들에 가려있던 산속 바위들도 앞으로 성큼 나와 있네요. 들판은 어떻구요. 지나 간 해의 농사 자국을 품에 안고 느긋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죠. 그러다가 동네 어귀에 느티나무가 틀림없을 거대한 나무가 서있어 봐요. 한 그루지만 수많은 가지들로 이루어진, 휘거나 곧은 크고 작은 무수한 가지들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어요. 당당하고 솔직해 보여요. 선비처럼 꼿꼿하게 서있는데 아름다워요.
 비행기를 타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죠. 비행기가 이륙을 준비할 때 그리고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비행기 사고를 떠올려요. 주님 내 영혼 받아주소서. 그러니 약간의 공포와 함께 여행은 시작되죠. KTX도 빠른 속도로 풍경을 눈에 담기도 전 스쳐 지나가버려요. 그렇지만 무궁화호는 달라요.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생각할 만큼 스쳐 지나가요. 무궁화호에 앉아서 하는 차창 투어는 느릿함과 안온함이 고급스럽기 이를 데 없어요. 무궁화호, 기차 중에서 가장 값싼 기차에서 무슨 고급스러움을? 설마 그대는 고급스러움이 돈의 경중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겠죠? 이름 모를 역에 기차가 서요. 요즈음은 시골이라도 역 주변으로는 아파트 건물이 숙숙 솟아오기도 하는데 강원도는 좀 다르죠. 빨간 옷을 입은 자그마한 아이와 엄마가 차에서 내려요. 엄마 앞서 팔짝팔짝 뛰며 걷는 아이 얼굴이 환하네요. 저 귀여운 얼굴을 볼 생각에 아침부터 서둘렀을 할머니 할아버지도 생각나는군요. 맛있는 고구마를 구워 놓았을지도 몰라요. 알맞게 익은 동치미도 가지런히 썰어 놓았을 거예요.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에 기차는 멈추기도 하죠. 그리고 가만히 기다려요. 누군가 기차 안으로 들어서길, 오래 된 겨울나무들과 사철나무로 휩싸인 경계를 지나 펼쳐질 다른 동네들을 상상하며 말이죠. 기다릴 만큼 기다리다가 스르륵 다시 움직이죠. 기차안의 누구도 급하지 않아요.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어요. 낯섬과 새로운 풍경만이 여행이 아니죠. 익숙하고 편안한 풍경이 주는 부드러움은 충만한 여수를 느끼게 해요. 풍경이 조금 지루해지면 음악을 듣기도 하죠. 스마트폰에 심어놓은 콩에서는 아무 때나 FM음악이 흘러요. 담아 온 보온병에서 커피 한잔 따르면 어디 이런 그윽한 카페가 있을까요. 물론 좋아하는 귤도 몇 개 백팩에 있어요. 
 눈을 찾아 나선 길이에요. 겨울의 한 여정이 되어 있네요. 작년, 재작년, 재재작년, 눈이 하도 안와서 강원도 날씨 예보를 보고 떠나는 거요. 태백과 정선 추전을 갔었는데..... 이번에는 민둥산역에 전화를 해봤더니 고한에는 눈이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오래 된 탄광도시 그리고 가까운 곳에 만항재가 있었어요. 수려한 자태로 키 큰 나무들이 곧게 서있더군요. 두툼한 목화솜 같은 눈 이불이 가득 덮인 숲을 보니 저 안에 갇혀있던 숨이 훅 쉬어지더군요. 이름도 ㅗ르는 마을도 산책하고 탄광의 시간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만든 삼탄아트마인 카페에서 쉬기도 했어요. 두 시간여 산책을 끝내고 다시 고한역으로 들어서는데 역사 지붕에 고드름이 맺혀 있어요.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더군요. 각시방 영창은 조그마하고 사랑스러운 각시방에 어울리는 고드름이라는 뜻일까, 아직 각시라 여린 소녀의 마음이 있어 고드름을 보면서 감탄할거라는? 꽃 없는 겨울에 꽃 대신 고드름으로 사랑을 고백하라는 뜻인가. 다시 무궁화호를 타고 고한을 떠납니다. 무궁화호는 가끔 역 아닌 곳에 멈추기도 해요. 빨리 가야하는 차를 위해서 비켜주는 거죠. 친절하고 배려 넘치는 자세죠. 아 폐가도 있네요.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따뜻한 집이었을 텐데요. 작은 개울과 함께 가기도 하죠. 거대한 폭포나 휘몰아치는 파도도 좋지만 저리 맑은 물 흐르는 작은 시냇물에는 빨래하기 좋아하는 아주 어린 소녀인 내가 있어요. 점점 어두워지는 차창, 졸기에 더 없이 좋은 흔들거림을 느끼며 잠깐 졸았는가....눈을 뜨니 출발지네요. 근사한 겨울 하루 여행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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