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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심층분석 (18)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12.24 11:51
  • 호수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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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 본지 논설위원)

둘째, 성경말씀의 실천으로서, 믿음대로 순종하는 신앙공동체였다. 믿음의 순종은 항상 형제연합교회가 전제하고 있는 성경 이해로 되돌아간다. 즉 성경은 유일한 삶의 표준으로서 말씀을 가진 성경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주님의 계명을 순종할 때 만족하였다. 형제연합교회는 교회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관계에서만 보존되며, 또한 그리스도의 계명을 성취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적인 신앙 행위를 통하여 증명하는 신앙공동체였다. 그리고 이들 형제연합의 신앙공동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 때문에 형제연합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모범을 보일 수 있었다. 
  체코의 신학자 흐로마트케(Hromdke)는 형제연합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 얼마나 독특한지를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여 순종하는 것과 비교하여 설명한 거에서 그 특징을 읽어볼 수가 있다. 즉 루터가 ‘하나님’이란 말을 들을 때, 그에게는 그 말씀은 ‘기쁨의 소식’인 ‘은혜, 은혜’로 들린다. ‘거기서 나를 너에게 주노라’, ‘나를 영접하라, 너에게 선물하리라, 너의 마음을 열라, 너를 안아주리라’, 또한 루터가 ’그리스도‘란 말씀을 들을 때,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거기서 그를 부르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자를 본다.’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나의 의로 옷을 갈아입어라!’ 너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죄지은 걸인‘이다. 그러나 ’너는 내 아들의 죽음으로 왕이 된 아들의 표지(標識)로서 황금의 왕관을 너의 머리 위에 씌우리라.’ 그러나 형제연합교회는 루터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즉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란 말을 동시에 듣는다면, ’나는 너를 부르며, 너에게 명령하며, 너에게 나의 뜻을 선포한다. 선하고, 선한 것을 너에게서 요구하며, 내 기쁨인 그것을 너에게 알린다.” 그리고 흐로마트케는 비교하면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루터에 의한 믿음은 텅 빈 두 손의 벌림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영접이며, 죄 용서로부터 온 기쁨의 확신이지만, 형제연합교회의 믿음은 아주 간단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겸손의 청취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으로, 구세주의 발자취를 따르며, 그와 맺은 언약 안에서 인내하며, 성취하는 그리스도의 멍에를 기꺼이 짊어지도록 준비하는 행동의 결단이었다.”
  우리는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은 이러한 성경 말씀의 이해와 함께 그들의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행동지향의 신앙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순수한 예수의 제자의 삶이요, 후스 신앙의 참된 추종자의 모습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셋째,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기를 배우고 훈련받게 하는 교회의 훈육(사랑으로의 지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신앙공동체였다. 교회는 코메니우스가 고전14:40을 자주 인용했던 “모든 것은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말씀처럼, 교회공동체의 참된 모습은 질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순종하는 삶이어야 함을 전제한다. 이것은 개별신자가 세상의 삶에서 어떻게 순종상태를 유지해야 하는가? 란 질문의 대답은 서로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임을 깨닫고,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연합과 통일에 두었다. 그것이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의 특징이며, 교회(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은 진실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으며, 다만 거기서 각각 받은 은사의 충만을 수용할 수 있게 되며, 그야말로 가족공동체로 형성된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게 된다(비교,행2:42, 4:32 등). 그리고 이러한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적용된 신앙훈련의 방법이 교회훈육(Kirchenzucht)이었다. 훈육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르치고 깨우치는 신앙훈련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실제적인 왕으로 다스리며 역사하도록 참된 순종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는 일었다. 즉, 결코 강요하거나 억압으로 따르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제 사랑으로 권고하며 권면하는 영혼의 돌봄을 위한 상담과 같은 대화의 역할이 동반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시행에서뿐 아니라, 역시 확고한 질서와 그가 부자든 가난한 자이든 신하이든, 통치자이든 모두가 동등하게 결속된 훈육(사랑의 권고)과 함께 있는 참된 신앙공동체였다. 또한 코메니우스는 특별히 그가 남긴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이란 글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이제는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하도록 권고하면서, 형제연합교회의 6가지 신앙의 유산이 보존되기를 희망한 내용 가운데 3번째가 ‘교회훈육’이었다(진리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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