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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 50 )예수천당 불신지옥를 외친 전도자 양용근목사 ( 1905 - 1943 )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12.23 16:54
  • 호수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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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관장, 본지 논설위원)

양용근 목사는 전남 광양군 진월면 오사리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용환이라고 되어있으나 교회에서 용근이라고 불렀다. 양용근은 순천 매산학교에서 공부하고 일본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가 일본의 니혼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있을 때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했다. 간악한 일본은 사회적 불안을 수습할 계책을 꾸며, 한국인들이 재난을 일으켰다며 6천여 명의 교포를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마치 네로황제가 로마 의 대화재 원인을 그리스도 인들에게 씌워 기독교를 박해하던 것과 같았다. 여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 양용근은 생명을 구해 주신 하나님께 남은 생을 주께 바치기로 서약한다. 그는 1930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장 고향인 광양에 오사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가산을 정리하여 후진을 양육하기 위하여 오사학원 이란 학교의 문을 열었다. 교과목은 민족혼을 일깨워 주기 위하여 한국사와 한글과 성경 과목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과 서약을 지키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1933년에 입학한다. 교회를 섬기며 졸업하기까지는 만 6년이나 걸려서 1939년에야 졸업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양용근의 신학생 때 일화는,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방청석에서 손양원 김형모 안덕윤 신학생들과 같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울분을 토했다. 그리고 11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1. 우리는 순교할 각오로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대열의 선봉장이 된다. 2.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목회를 한다. 3. 기복신앙을 타파한다. 4. 신사참배를 결사반대한다. 5. 삯꾼 목자가 되지 않는다. 6. 날마다 관제로 이 몸을 바치는 정성으로 산다. 등이다, 그리고 네 사람은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한 후에 “일사각오를 다짐한 후”라는 글을 사진 위에 남겨져 있다.

양용근 목사는 고향인 광양읍교회(1908년 오웬선교사 개척), 여수 애양원교회, 고흥 길두교회, 구례읍교회에 시무하였다. 그는 시무하는 교회마다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며 다음세대를 준비했다. 애양원교회에서는 헌신적으로 환우들을 돌보다가 손양원 목사에게 바턴을 넘겼다. 양용근 목사가 순천노회 사건으로 검거되어서 실형을 받게 된 중요 사건인 고흥지방 연합 사경회도 길두교회 시무 때에 있었던 일이다. 1940년 봄, 길두교회와 같은 포두면에 소재한 송산교회(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양용근 목사를 강사로 고흥지방 연합 사경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양 목사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멸망 한다.’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다. 여기 우상숭배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라는 것이었다. 양 목사는 일본 형사들의 감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교를 각오하고 우상숭배가 큰 죄임을 내세워서 신사참배에 반대해야 함을 강하게 외쳤다.

일제는 1941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순천노회의 목사, 장로들을 구속하였고 또한 앞장서있는 양용근 목사를 체포되었다. 그는 광주 교도소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며 옥고 치루다가 해방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2남 2녀의 어린 자녀들과 사랑스런 아내를 남기고 추운 감방에서 38세에 순교자가 되었다. 1943년 12월 5일에 신앙을 지키며 최후를 마치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후손 가운데는 양향모 목사(광성교회 담임, 개혁주의목회자훈련원장)가 조부의 걸어가신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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