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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심층분석 (14)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11.13 17:33
  • 호수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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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 본지 논설위원)

형제연합교회는 1494-1528년 사이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이 기간에 교회를 정착시키고, 가톨릭의 종교박해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복음의 사도적인 신앙을 견지하고, 당당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성장시키는 일에 3명의 지도자들이 차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루카스 폰 프라그(Lukas von Prag)와, 얀 아우구스타(Jan Augusta), 얀 불라흐스라브(Jan Blahslav)였다. 1517년에 루카스 폰 프라그(1640-1520)는 형제연합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 되었다. 그는 신학자로서 형제연합교회의 조직을 확대하며, 지금까지 형제연합교회가 진리 수호를 위하여 그간 폐쇄적이며, 분파적이었던 모습에서 개방적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즉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더욱 성취하기 위하여 복음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강조하게 된다. 그는 특별히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본질적인 것과 목회 수단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 등으로 구분하고,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직접 연관된 것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사역의 중심에다 놓았다. 형제연합교회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였으며, 이러한 믿음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그 어떤 노력(공로)이 개입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사랑 또한 하나님의 활동으로 이해하였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믿음, 사랑 가운데 참된 소망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소망은 기독인의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표를 밝혀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이러한 소망은 하나님과 기독인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사역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목회의 수단적인 것은 교회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성례와 열쇠의 직무 수행이었다. 그리고 목회수단의 사용목표는 역시 모든 사람을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루카스는 교회의 사역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것과 목회 수단적인 것을 구분함으로써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을 특징짓는 일에 기여하며, 형제연합교회가 성경과 교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 형제연합교회와 종교개혁자들과의 관계
  1517년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Luther)는 1519년에 비로소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의 가르침이 매우 복음적인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루터는 후스파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하였고 후스의 종교개혁을 인정하고, 형제연합교회와 공개적으로 교제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 지역에서도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역시 반대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인 루카스(Lukas)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입장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인하기 위하여 마침내 형제연합교회와 루터가 만나게 된다. 특히 루카스와 루터와의 만남은 루터교회와 형제연합교회가 긴밀하게 교제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로서 연합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루카스가 죽은 후, 얀 아우구스타(1572년 사망)가 형제연합교회의 장로가 된다. 그는 신학자로서, 설교가로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었다. 1542년에 비텐베르그를 방문하여 루터와 교제하였으며, 그가 1532/33년에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고백문을 만들 때, 루터가 만들었던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의 도움을 받았고, 루터는 신앙고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고, 그 고백서의 서문에 추천 글을 직접 써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와 루터의 관계는 루터와 멜란히톤(Melanchton)이 죽은 후, 유감스럽게도 악화상태로 빠져갔다. 그 이유는 강한 종파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루터파의 추종자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것은 루터파 교회는 유럽 전체의 프로테스탄트들과 연합을 외면하고, 그들 자체의 안전만을 생각하여, 행동햇던 일들이 알려지면서 형제연합교회의 불신을 초래하였다. 결국 1555년에 체결한 아욱스부르그 평화화의( Religionsfriede von Augsburg)가 문제였는데, 특히 “통치자의 영토에 통치자의 종교를”(Cuius regio, eius religio)이란 평화협약의 문구로 인하여, 루터파만 살아남으려는 정치적인 의도에 관한 오해가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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