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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세적인 삶푸른 물결 주위에 야자수가 뻗어 있는 오아시스... 목마를 때 언제든 가서 마실 수 있는 생명수. 바로 내 곁에 오아시스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있기에, 우리는 사막과 같은 무더위에서 무사히 헤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8.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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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각자 다른 위치와 상황에서 작동된다.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관을 설계하고, 또 때로는 직업이나 재산의 높고 낮음을 떠나 “살아가기”를 위해 험한 산을 넘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이 아닐까? 병원에 가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눈물로서 사투(死鬪)를 벌이는 것을 볼 수 있고, 또 화려한 정원에서 차(茶)를 마시는 것을 보면, 저렇게 여유있는 모습이 있을까? 이런 양면성을 우리는 삶에서 엿보게 된다.

또 가끔씩 인생은 마치,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오게 마련이다. 선택의 기준이나 장단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결국 선택을 한 본인의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삶의 작동방식이다. 물론 우연히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고통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뉴스(News)를 통해서 정말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들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게 만드는 경우도 목격한다. “맑은 하늘에 날 벼락”이라는 속담처럼, 우연히 내 삶에 고통의 처절함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자연의 재앙 앞에서 처절하게 고개를 떨구어야 할 경우도 있다. 영화 [해운대]는 쓰나미의 재앙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동시에 자연의 거대한 힘과 경이로움에 대해 숙연하게 만든다. 때론 이렇게 인간의 한계의 끝을 경험하게 하는 삶의 작동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염세적인 삶에 대해 관조(觀照)하게 되고 결국 절망의 상자 속으로 몸을 숨기게 만든다.

염세주의(厭世主義) 또는 비관주의는 ‘최악(最惡)’을 뜻하는 라틴어 ‘pessimum’에서 유래한 말로, 낙천주의(Optimism)에 반대되는 말이다. 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있고 사람이 사는 동안은 이를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이며, 흔히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하루는 작은 일생이다.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나는 것이 탄생이요, 상쾌한 아침은 짧은 청년기를 맞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저녁, 잠자리에 누울 때는 인생의 황혼기를 맞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네 삶이 너무나 짧고 유한하기 때문에, 하루 동안 다 이루지 못하고 이내 비관하면서 내일이 없는 염세주의로 빠져 들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파랑새를 찾아서.....

우리가 세상 속에서 힘겹게 사는 것이 삶의 모습이지만, 예상치 못한 불행으로 인해 우리는 더욱 염세의 첩경(捷徑)으로 접어들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또 우리들은 지나친 허무주의와 염세적으로 흘러가지 말아야 할 ‘인생의 지침서’가 있다. 허무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생이지만, 우리에게는 그 한계를 극복할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복음(Gospel)’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하셨다. 너무나 짧은 말씀이지만, 이 성경 말씀 한 구절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절망의 화로를 순식간에 생명수로 시원하게 적실 수 있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 제한적인 능력의 소유자, 해운대의 쓰나미처럼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가만히 지켜만 볼 수 밖에 없었던 우리네 삶에 “파랑새”가 날아온 것이다. 잠시 되돌아보니 이미 내 마음속에는 파랑새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바로 곁에는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계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끝으로 명작 소설 [어린왕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사막 한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우리의 지친 모습. 하지만 어딘가에 시원한 생명수가 철철 흘러넘치고 있을 오아시스를 연상해보자. 푸른 물결 주위에 야자수가 뻗어 있는 오아시스... 목마를 때 언제든 가서 마실 수 있는 생명수. 바로 내 곁에 오아시스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있기에, 우리는 사막과 같은 무더위에서 무사히 헤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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