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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 39 )부산서 사역하고 평양숭실대학을 세운 베어드선교사.(1862~1931)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09.18 15:41
  • 호수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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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장, 본지 논설위원)

베어드(William M. Baird)는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했다. 1885년 하노버 대학, 1888년에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고, 1890년 애니 양과 결혼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1891년 1월이었다. 베어드의 일기를 보면 “거의 매일 무서운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이곳저곳에서 하늘로 치솟는 것을 보았다.”라고 할 만큼 전염병이 만연한 시대였다. 베어드는 1892년에 사랑방에 서당을 열어 교육과 전도를 시작했다. 1년이 안 되어 100여 명씩 모였다. 베어드 부부는 5년 가까이 부산에 머물면서 선교와 교육에 헌신했다. 이들의 활동은 부산 근대화의 씨앗이 되었다.
베어드는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는 전도자였다. 그는 한국인 전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했는데, 한국 초기 신자 중 한 사람이자 매서 전도인 이었던 서상륜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베어드는 그의 사랑방에서 1892년 11월에 영선현 교회(현 초량교회로 주기철목사를 배출.)를 설립하고 사역을 서울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그의 선교는 교육 선교로 집중되었다. 그는 서울 곤당골에 학교를 세웠고 이미 있던 예수교 학당도 맡았다. 이 학교들은 모두 고아를 상대로 했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때는 조선 왕의 요청으로 선교사들이 궁전에서 불침번을 서야 했다.

베어드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딸 낸시 베어드를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는다. 이 아픔의 흔적은 부인인, 애니 베어드가 작사한 찬송가 387장 '멀리멀리 갔더니'에 녹아들어 있다. 애니 베어드는 찬송가 번역사업은 물론,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등 한국어 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고영규젼' '부부의 모본'이란 단편소설까지 쓴 다재다능한 지식인이었다.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애니는 안타깝게도 암에 걸려 1916년 선교 현장에서 생을 마쳤다.

베어드는 1897년 10월 10일 평양의 자택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을 데리고, 숭실학당을 개설하여 1900년에는 4년제 중학교로 발전시켰고, 1905년부터는 대학교육을 시작하여 1908년에 2명의 첫 졸업생을 내었다. 이 학교가 그 뒤 숭실대학으로 발전했다. 베어드는 이 숭실학당에서 민족주의자 조만식, 한경직목사, 방지일 목사 등 굵직한 인물들을 키워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1938년 자진 폐교로 맞섰다. 베어드가 뿌린 교육 선교의 씨앗은 항일 민족의식으로 자라났다.

숭실학교의 특색은 학생들의 학자금 자급제도와 자립정신에 있었다. 베어드 박사는 학생 전부가 작업하고, 그 수입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졸업 후 활용하도록 했다. 베어드는 육체노동을 천시하고, 글만 읽는 것을 자랑하는 한국인들의 생각을 개혁하고 그는 학생들에게 근로와 자립정신을 불어 넣어주었다.

베어드 박사는 1916년 아내를 잃고부터 문서사업에 주력했다. 1918년 페틀로프 양과 재혼을 한 후 성서 번역에 열중했다. 그는 김인준 목사, 남궁혁 박사 등과 함께 구약성서 개역에 힘썼고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1931년 10월 당시 숭실전문학교의 초청으로 한국에 들어왔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2주간의 치료도 보람 없이 11월 28일 소천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평양 숭실학교 구내에 묻혔다. 이국땅에서 한국이름을 갖고 온 생애를 던져, 교육과 섬김의 역사를 써 내려갔던 베어드와 그의 가족들을 한국교회는 기억해야 한다.

숭실대학을 세운 베어드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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