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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 코메니우스 심층분석(6)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08.21 15:59
  • 호수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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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 , 본지 논설위원)

2) 코메니우스의 작품과 그의 활동역사
1650년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에 드리는 위로의 글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은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교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형제연합교회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면서, 형제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유산인 6가지를 보존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진리의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표현해 놓았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직이 되었다. 그리고 1649년 57세 나이에 요한나 가요소바(J.Gajusova)와 함께 세 번째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하도록 코메니우스는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항가리(Ungarn)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로 개혁하는 일을 해달라는 초청으로 그곳으로 먼저 가게 된다(1650년).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곳에서 학교교육의 책임자가 되었고, 그 유명한 두 권의 교재인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Orbis sensualium pictus)와 놀이학교(Schola Ludus)란 책을 출판하게 된다. 전자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으로 언어와 세계의 자연 피조물과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한 모든 지혜학습의 모범적인 책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학교를 아이들의 놀이의 장, 즐거움의 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고, 연극 상연 등을 하도록 대본을 제시한 책이기도 하였다.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는 1658년에 준비하여 라틴어-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역시 항가리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불행하게도, 그를 지지하던 영주 라콕지(Racockzy)가 전쟁에서 전사하였고, 사로스파탁의 사람들에게서 코메니우스가 원했던 범지혜의 교육에 관한 관심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리사에서의 형제연합교회는 코메니우스가 다시 리사로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3번째 다시 리사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 역시 코메니우스에게 우호적이지 못했다. 30년 종교전쟁은 끝났지만, 부분적으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의 대립 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특히 스웨덴이 폴란드에서의 전쟁으로 코메니우스가 제2의 고향처럼 머물렀던 리싸가 가톨릭 군대의 침입으로 정령 당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코메니우스의 집과 모든 서재가 불타게 되었고, 그가 그동안 작성하고 준비했던 원고들의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황급히 코메니우스는 리사에서 피난처를 또 찾아야만 했었다.
  원래 코메니우스는 영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코메니우스 인생의 마지막 기간이 암스테르담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그는 이전에 큰 도움을 받았던 화란의 거부, 루이스 더기어(Louis de Geer)의 아들인 라우렌티우스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의 도움으로 암스테르담에서 코메니우스는 14년을 살게 되었다. 코메니우스 옆에는 그의 사위 피터스 피굴루스 야불론스키(P.P.Jablonsky)가 동행하였다.
 
  여기서 코메니우스는 두 가지 큰 작업에 열중하였는데, 하나는 ‘교수학총서’(Opera didactica omnia)를 출판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시도했던 “인간사물의 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의 글을 완성 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끝내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다. 물론 총 7권으로 구성된 라틴어 원고였지만, 그 가운데서 1-2권은 암스테르담에서 출판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모든 교육과 관련된 문서들을 총 집결시킨 교육학총서는 암스테르담 시 정부의 재정후원으로 출판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코메니우스의 곁에는 예언하는 자들이 항상 동행하였는데, 크리스토퍼 코터, 크리스티나 포니아톱스카, 니콜라우스 드라빅 등의 인물들이었다. 코메니우스는 때때로 그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일로 일찍이 형제연합교회에 고소당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며,  “계시의 역사”란 글과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이란 글을 발표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드라빅의 예언인데, 그는 30년 종교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승리하고,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했으나, 그 예언은 적중되지 않았으며,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심지어 코메니우스의 옛 제자였던 폴란드의 형제연합교회에 속한 니콜라우스 아르놀드(N.Arnold,1618-1681)의 코메니우스의 신학을 비판하였는데, 코메니우스는 큰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예언과 관련된 여러 비판에 관하여 그냥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다. 마침내 1665년에 “어두움에서의 빛”(Lux a tenebris)이란 책을 출판하여, 긴급한 전쟁의 위기상황에서 예언을 통하여 하나님이 형제연합교회의 미래를 밝히는 뜻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고 드라빅(Drabik)의 소리에 경청했던 사실을 고백하였으며,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 외에 어떠한 구원의 계시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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