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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심층분석(6)역사적인 인물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07.31 17:13
  • 호수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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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ㅠ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 소장,전 총신대학교 총장,본지 논설위원

2) 코메니우스의 작품과 그의 활동역사
1620년대의 영국의 퓨리턴의 지도자였던 레비스 베일리스(Levis Balylys)의 ‘경건의 실제’(Praxis Pietatis)란 책을 형제연합교회 형제들의 경건을 돕기 위하여 체코어로 번역의 해설서를 출판하였으며, 또한 런던에 기거하면서 퓨리턴들의 배후에서 경건운동을 독려하고 지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를 영국으로 초청했던 배후의 인물은 그의 하르트ㅤㄹㅣㅍ 이었는데, 그 역시 퓨리턴의 지도적인 형제들과 교제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퓨리턴들이 주도하는 영국의 국가교육계획수립의 과제가 코메니우스에게 부여되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1642년 6월 영국을 떠나 스톡홀름으로 향하는 도중에 암스테르담에 들리게 된다. 여기서 그는 스웨덴의 초청을 받도록 힘썼던 데 기어(Louis de Geer)를 만났으며, 또한 라이덴 근처, 엔데게스트 성(endegeest)에 머물고 있던 데카르트(R.Descartes)도 만나게 된다. 물론 두 인물의 만남은 각각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사전에 준비했던 일이며, 오래 살았던 코메니우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데까르트와의 역사적인 만남을 상세히 기록하여 전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은 서로의 학문적인 경의를 표하였고, 데까르트는 코메니우스의 범지혜의 철학과 세계 공용어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였으며,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수학적인 사고방식과 엄격한 검증에 감탄하였으며, 수학과 자연과학의 발전에 생각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서의 차이점은 이성 중심의 인식에 관한 것인데, 데까르트가 그의 모든 사상체계를 오직 이성에 근거하여 구성하는 반면, 코메니우스는 지식습득에는 이성과 더불어 인간의 감각과 하나님 계시의 증거가 필요함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후에 여러 글들에서 그러한 문제들을 잘 분석해 내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명제를 비판하게 되는데, 생각할 때만 존재하고 잠잘 때는 존재하지 않는지를 반문하면서, 인간은 생각하면서도, 행동해야 하는 존재임을 강조하였으며, 데까르트 철학에 나타나는 생각과 행동의 이원적인 분리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데까르트를 비판하기보다는 그를 추종하는 자들(Cartesianer)의 데까르트에 관한 사상의 왜곡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그의 말년에 암스테르담에 산재해 있는 데까르트주의(Caetesianismus)적인 사고를 “철학의 암적인 훼손‘(Der Krebsschaden der Philosophie)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코메니우스는 이때 1642년 8월, 50세의 나이에 역시 스웨덴의 초청을 받고 스톡홀름으로 가게 된다. 거기서 스웨덴의 수상 옥센스티에르나(A.Oxenstierna)를 만나고, 루이스 데기어(R.de Geer)의 재정후원으로 스웨덴의 학교개혁을 위한 새로운 교재 집필을 위임받게 된다. 코메니우스는 이 작업을 스웨덴의 영토였던 독일의 동북해안에 있는 도시 엘빙(Elbing)에 거하면서 수행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곳이 형제연합교회가 있는 리사(Lissa)와 거리상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형제연합교회를 돌보는 일을 병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스웨덴의 학교교재 집필 외에도, 그가 후에 미완성 작품으로 남긴 세계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제언서(CC)를 준비하였다.
  1648년 56세가 된 코메니우스는 리사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도로테아(Dorothea)가 병으로 죽게 된다. 1618년에 시작된 30년 종교전쟁은 마지막 국면에 이르게 된다. 가톨릭 편인 프랑스와 프로테스탄트 편인 스웨덴 사이의 전쟁은 뮌스터 오스나부릭에서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Westfallia Friede, 1648)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형제연합교회의 종교자유는 거기서도 보장되지 않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고향이며 조국인 보헤미아는 적그리스도인 가톨릭의 통치하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역시 형제연합교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1650년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에 드리는 위로의 글 “죽어가는 어머니, 형제연합교회의 유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내용은 형제연합교회의 죽음을 탄식하며, 어떻게 유럽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할지를 되묻고, 교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형제연합교회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면서, 형제들이 프로테스탄트의 다른 교회들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할 때, 형제연합교회의 신앙유산인 6가지를 보존하게 되기를 희망하였다(진리의 사랑, 성경 말씀에 충성, 교회의 훈육, 모국어 보존, 교회연합 정신 등).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표현해 놓았었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상황에서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직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직이 되었다. 그리고 1649년 57세 나이에 요한나 가요소바(J.Gajusova)와 함께 세 번째 가정을 꾸리게 된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작품들이 출판하도록 코메니우스는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항가리(Ungarn)의 사로스파탁(Sarospatak)에 있는 라틴어 학교를 코메니우스의 범지혜로 개혁하는 일을 해달라는 초청으로 그곳으로 먼저 가게 된다(1650년). 역시 코메니우스는 그곳에서 학교교육의 책임자가 되었고, 그 유명한 두 권의 교재인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Orbis sensualium pictus)와 놀이학교(Schola Ludus)란 책을 출판하게 된다. 전자는 어린아이들이 그림으로 언어와 세계의 자연 피조물과 정신과 기독교 신앙을 배우게 한 모든 지혜학습의 모범적인 책이었다. 그리고 후자는 학교를 아이들의 놀이의 장, 즐거움의 장이 되게 하는 것이었고, 연극 상연 등을 하도록 대본을 제시한 책이기도 하였다. “그림으로 배우는 세계”는 1658년에 준비하여 라틴어-독일어판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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