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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 칼럼 (기정도 목사)한국인의 恨
  • 기정도 목사
  • 승인 2019.06.11 15:43
  • 호수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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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정도 목사 , 기성 자동교회 명예)

한국인의 한은 한국적 애상의 정서라 할 수 있다. 외국의 일본과 중국에는 한이 없고, 원만 있다고 본다. 농어나, 맹자나, 대학과 그리고 중용과 시경 등의 중국의 고전 속에는 한이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없고, 대신 원에 대해서만 나오고 있음을 국어 국문학 사전에서 밝히고 있다. 아프리카 에서는 몇 권의 인류학 보고서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한 감정을 기록하고 있으나, 그 역시 한국적 한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도 정서적 기조의 특질로서 동양 개념의 한은 볼 수 없다. 원과 한에 가까운 영어에는 유감으로 여기다의 ‘regret' 와 원망이라는 'resentment' 증오와 악의 ‘rancor'의 단어가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원과 한의와는 먼 거리에 있다.

중국에서의 원한은 현세적 명분에 치우쳐 있다고 본다. 삼국지나, 열국지의 처절한 복수는 유교적 현실주의가 복수로 처리 된 것이라 하겠다. 원은 원으로 대하라는 공자의 입장은 원풀이, 곧 복수가 孝와 忠의 명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怨도 복수를 통하여 원환에 대한 승리(怨勝)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忠과 臣은 원수를 어떻게 갚는가 하는데서 그도(度)를 보여준다. 문헌의 예를 든다면 ‘아사노가 기라’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원이었으며, 이러한 원을 해결하는 최후의 수단은 칼(刀)이었다. 예를 든다면, 아사노는 원한을 갚는데 실패하여 자책으로 활 복 자살하고 만다. 이 때문에 원은 더욱 악화 되어서 47명이 기라의 목을 잘라 주군의 무덤에 바침으로서 원한에 대한 승리가 된다.

서양인들의 원한은 별로 남지 않는다. 구약 성경은 이 (齒)는 이로 눈(目)은 눈으로 발(足)은 발(足)로 갚으라는 말이 약 3번 나온다(출21:24, 레24:20, 신19:21). 그렇지만 신약의 주님은 용서라는 사랑으로 원수가 형제로 변화 될 수 있도록 복음을 제시 하셨다. 이러한 복음 때문에 외부의 충격에 불만이나 납득이 가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자신을 대립 시키는 외향(外向) 처리를 복음을 통하여 이해하므로 외부의 충격이 원한으로 남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하지만 왜 한국인에게만 恨이 많을까? 나는 그 근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歷史와 종교와 사상과 지역주의와 가정 문제를 통하여 한이 발생 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는 불안의 역사이다. 위축의 역사이다. 한국의 역사는 민란과 내란과 외침(外侵) 으로 점철 되어 있음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의 난(亂) 때문에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도록 만들어 졌다. 이 현상이 심리적으로 퇴행적 심리 현상을 낳게 하였으며, 그 결과로 한국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깊은 우울증에 시달려서 한이 남게 되었다.

 

기정도 목사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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