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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 29 )해제면 무의촌의 성자, 순교자 임인재 장로 (1900~1950)
  • 김헌곤 목사(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 승인 2019.06.11 15:31
  • 호수 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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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목사 (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해제중앙교회 (현재담임 :오승용 목사)는 1932. 3. 1 배윤화씨 가정에서 “양간다리 기도처”로 출발하였다. 초대 교역자는 정나열 전도부인이다. 1937. 5 교회 이름을 “양매교회”라 하였고 1967년 3월 지금의 해제중앙교회라 교회 이름을 변경하였다.

순교자 임인재 장로는 1900년 황해도 화우군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도움으로 1927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의사로서 1938년부터 한반도 서남단 끝자락인 무안군 해제면 신정리에 들어가 해동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을 했다. 그가 무의촌을 택한 것은 목포 양동교회 담임하고 전남지사를 지냈던 이남규목사의 권면을 받았다고 한다. 임인재 의사는 해제면을 돌면서 병자들을 치료하고 전도하였다. 치료비가 없는 자에게는 치료비 대신, 교회 올 것을 권면했다. 그는 해제면에 존경받는 어른이요 작은 예수의 모습이었다.

    임인재 장로  교회 마당안에 있는 5인 순교비

임인재 장로는 주일이면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 교역자로 봉사하고, 평일에는 무의촌을 돌아다니며 헌신하였다. 제2차 대전에 전쟁물자 공출로 일본경찰들이 교회의 종을 떼고 있을 때 좇아가 "하나님의 집의 성물을 감히 경찰이 압수해 갈 수 있다니" 소리치자, 연행하여 무수히 구타하며 괴롭혔다. (장로안수는 1942년 받음) 1945년 해방되자 면지도자로 대한독립촉성회장 직을 받았다. 공산당이 지하조직을 구축하면서 임장로는 당연히 타도대상이 된다. 임장로를 괴롭히기 위해 그들은 임장로가 사랑하는 교회에 불을 질렀다. 임장로는 한걸음에 달려가 종을 쳐서 화재사실을 알려 진화했다. 30분 이상 불이 탔는데 지붕만 탔고 기둥과 석가래는 말짱했다. 임장로는 땅에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하며 더욱 충성하기로 서원을 했다.

한국전쟁을 일으킨 공산주의자들은 우익세력을 무차별 체포하기 시작했다. 교인들의 피난 권고에도 임장로는 머리를 저으며 "양들을 버리고 장로가 저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라고요? 저는 못합니다." 거절했다. 결국 임장로는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당하여 모진 매질을 당하던 중, 부상병들이 몰려오자 공산군은 그에게 치료를 부탁했지만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에게 의술을 베풀 수 없다며 거부하자 초등학교 교사인 그의 맏아들 정순씨를 아버지 앞에서 고문하여 후유증으로 6개월 만에 죽게 했다. 1950년 8월 8일 해제국민학교 교정에서 임장로를 비롯한 집사 3사람을 인민재판으로 총살했다. 임장로는 3발의 총을 맞고 총살을 당하면서도 입에서 성경말씀이 쏟아져 나왔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 12:25) 면민들은 소리 내어 울지는 못하지만 '흑흑' 흐느꼈다. 얼굴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지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가 의사로 교역자로 면민들의 상처를 싸매주던 임장로에 대한 위로의 표시였다.

임장로와 함께 그 당시 순교한 성도는, 김대업전도사, 김판업집사, 황인경집사, 홍순용집사이다. 이들에게 지역 공산당들은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면 살려주겠다!’ 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이시대의 교인들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을 붙잡고 순교하신 분들의 믿음과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김헌곤 목사(문준경순교기념관 관장)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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