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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한국교회<4>개혁신학적 이해(I)
  • 김영한 교수
  • 승인 2019.06.11 15:12
  • 호수 446
  • 댓글 0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2) 2.8독립선언서의 의의: 왕조체제 타파, 근대 민주 공화국 선포

도쿄 2.8거사(擧事)에 앞서 1919년 1월 초순에 송계백(보성중학교졸, YMCA 영어과 제6회 졸업생)이 국내에 밀파되어 2.8독립선언서는 여러 과정을 거쳐 천도교 교주인 손병희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선언서를 읽은 손병희는 교단 회의를 통해 3·1운동 궐기를 결의했다. 그리고 각계 대표를 만나서 국내 청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

2.8 독립선언서는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거부한다는 뜻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무엇보다 국내 민족지도자와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2·8독립선언서는 3·1운동으로 계승되어 한국민족이 이제는 식민지배의 압제에서 벗어나 일어날 것을 주문했다. 2·8독립선언서는 독립 이후 한민족이 건설해야 할 사회가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근대국가라는 것을 명확하게 짚은 민족의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3.1독립선언서는 2.8독립선언서의 뜻을 대체로 이어받고 있다. 2.8 독립선언은 3.1운동의 여파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 토대가 됐다.

3. 기독교의 결정적인 역할: 지역교회 교인들과 지역 기독교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

1)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의 주도로 기독교계 연합과 천도교와의 합작

국내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평양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했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시내의 기독교인과 기독교학교와 관립학교의 기독학생들을 총동원해 독립운동을 벌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천도교가 일찍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1919년 1월 25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에게 보고하고 기독교 등의 종교계와 사회명망가 등을 망라한 민족대연합의 운동으로 추진할 것을 결정했다. 기독교와의 교섭은 평북의 정주의 오산학교 교장 이승훈과 접촉하도록 했다.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 알게 된 이승훈은 천도교-기독교 합착을 추진했다. 이승훈 장로는 선천의 자방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었던 양전백 목사, 유여태 목사, 김병조 목사, 이명룡 장로 등과 긴급회합해 독립만세운동 거사(擧事)를 알렸다.

이에 평양을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던 기독교계 독자적인 독립만세 운동은 수정되어 서울의 감리교, 천도교와 연합하는 민족대연합의 독립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기독교, 천도교, 불교가 연합해 3.1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서명자 순서로 갈등을 빚을 때 남강 이승훈은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건 죽는 순서인데 누굴 먼저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며 양보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서명자들(33명 가운데 29명,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김병조 미참)이 모인 가운데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본래 독립선언 예정 장소는 탑골공원이었으나, 일제 군경이 행사를 강제 진압시킬 것을 경계한 민족대표 중 한 분 박희도(종로감리교회 전도사로 YMCA 간사)의 건의에 따라 장소를 바꾼 것이다. 기독교계의 길선주, 김병조, 유여대, 정춘수는 미참하였다. 천도교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이미 교회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배포되었고, 선교사들과 일본 정부의 관계 요로에도 배포되었다.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을 한 후에 자진해서 경찰 당국에 신고하고 연행되었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담긴 비폭력적 저항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민족대표를 기다렸으나 이들이 나타나지 않자, 파고다공원에서도 학생들 중심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시가행진이 종로거리를 지나갈 때 이를 지켜보았던 윤치호(尹致昊)는 그날의 광경을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기술했다.“거리를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광장(지금의 종각 앞 사거리)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이 시위와 연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회관(YMCA)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곧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김상태 역,『윤치호일기』(1916-1943), 77-78쪽). 윤치호를 포함한 국내 지도급 인사들(한규설, 박영효, 윤치호)의 당시 상황인식은 한마디로 독립 무망론(無望論) 혹은 독립운동 무용론(無用論)이었다. 

 

김영한 교수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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