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1.1.16 토 11:33
상단여백
HOME 독자기고 특별기고
3.1 운동과 한국교회 <2>개혁신학적 이해(1)
  • 김영한 교수(숭실대 명예교수)
  • 승인 2019.05.01 15:46
  • 호수 442
  • 댓글 0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1. 3.1운동의 모태는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의 여운형과 김규식 독립운동

  김규식의 이 발언은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가장 시원적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은 후속 조치로서 국내, 만주 및 러시아에 밀사를 파견했다. 선우혁(장로교 인으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난을 겪은 뒤 상하이로 망명), 서병호(서상윤 장로의 아들), 김순애(김규식의 아내), 김철, 백남규 등은 1919년 2월 국내에 잠입하여 국내 지사들과 접촉해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참가를 알리고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선우혁은 귀국후 우선 105인 사건의 옛 동지인 양전백(장로교 증경 총회장), 평북 정주의 이승훈 장로를 만나고, 평양 기독교의 유력 인사인 길선주(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를 만나서 당시 국제정세와 이에 따른 독립운동을 논의해서 적극적인 찬동을 얻었다. 그후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인 강규찬(산정현 교회 담임목사), 김성탁(송오동 교회 담임 목사), 변린서(장대현 교회 장로) 등 여러 기독교 인사들과 논의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신한청년당 내의 일본 유학생들을 일본으로 파견해 도쿄 유학생들과 접촉하게 했다. 도쿄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 청년회(동경 조선 YMCA)와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의식을 배양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서 간행된 미국계 영자신문 「The Japan Advertiser」을 통해 재미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이 알려지면서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2.  3.1운동은 도쿄 2.8선언에 의해 준비됨

  1) 도쿄 유학생들 중심으로 한 2.8독립선언 운동: 국권 강탈당한 후 처음의 독립선언

  3.1운동의 횃불은 일본 유학생에 의하여 조선기독교청년연합이 사용하던 도쿄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있었던 2.8선언에 의하여 점화되었다.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919년 1월 18일에 강화회담이 파리에서 열리게 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 Wilson)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

  당시 일본 도쿄 유학생 수는 592명(1918년 현재)이었는데 이들은 세계대전의 종전 소식과 함께 월슨 미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이 기회에 또 한 차례의 거국적 독립운동을 일으켜 성사시키겠다는 뜻을 다짐하는 비밀회의를 하였다.

  1919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강화회의에 조선인 대표로 이승만과 민찬호, 정한경 등이 참석해 일제의 침략 행위를 알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열망이 퍼져갔다. 이에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던 근촌 백관수는 최원순과 정광호, 김안식, 김현준과 함께 조선 유학생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독립의사를 천명하기로 했다.

  이들 일본유학생 5백여 명은 1919년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 대강당에서 "조선청년독립단" 발족(근촌 백관수가 단장)을 선언하고 준비된 이광수가 기초, 수정, 탈고한 2.8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김영한 교수(숭실대 명예교수)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김영한 교수(숭실대 명예교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