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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재 목사의‘성지역사이야기’<5>하 란(2)
  • 서광호 기자
  • 승인 2019.04.02 11:19
  • 호수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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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란 월신전 전경

2. 하란의 역사

B.C. 610년 메대에 의하여 앗시리아의 성읍이 파괴되고 점령당할 때 마지막 저항의 근거지였으나 3년 만에 함락되고 약탈당하였다.

후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의 지배와 이슬람의 지배를 거쳐 십자군 원정 때는 이곳이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1104년에 그때까지 무적을 자랑하던 제1차 십자군이 하란에서 이슬람군에 첫 패배를 당했고, 십자군의 동진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처럼 강했던 하란성도 몽골의 침입은 이겨내지 못하고 1259년 몽골군에 의하여 점령되었으며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후로 하란은 조그만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하란에는 옛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짧게 잡아도 B.C. 2500년경부터 형성된 유적이다. 오랜 세월 동안 부침을 거듭하며 새로운 종족과 문화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아래쪽은 초기 500여 년간 부유한 성읍이 존속했음을 알려주는 진흙 벽돌의 주거 터가 있고, 상층부의 가장 높은 곳에는 거대한 신전의 하부 주춧돌이 있으며 아슈르바니팔(Assurbanipal)은 그 주춧돌 위에 신전을 재건하기도 했다. 상층부로 오르는 길은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읍은 이 언덕 위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언덕의 주변부에 있었고, 로마 시대와 이슬람 시대의 돌무더기 아래 6.9m 지점에 매몰되어 있다. 하란의 발굴은 이슬람 시대에 초점을 두었으므로 비교적 겉 부분 발굴에 국한되었으며 대강 발굴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언덕을 더 파 내려가면 고대의 유적들이 나타날 것이다.

앗시리아의 지배를 받을 때는 달의 신에 대한 제의적 중요성 때문에 하란은 병역의무에서 제외되고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특히 달의 신전 제의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였다. 벨사살의 아버지 나보니두스(Nabonidus – 바벨론의 마지막 왕으로 외국 원정이 잦았다. 벨사살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국내정치를 관장하는 중에 잔치에서 성전 기물로 술을 마시다가 메대와 페르시아 연합군에 의하여 피살되었다.)는 달의 신에 대해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란의 달의 신에 대한 신앙은 이 지역을 비롯한 소아시아가 기독교화하였을 때도 중단되지 않고 번성할 만큼 뿌리가 깊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도 달의 신을 섬겼다고 한다.

하란의 서쪽에는 야곱이 이곳에 도착하여 마셨다는 야곱의 우물이 있다. 한때는 방치되어 매몰될 위기에 처했으나 이스라엘에서 자금을 제공하여 사방으로 담을 쌓고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우물 주위에도 콘크리트 보호벽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우물은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계단을 따라 내려가게 되어있다.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물을 얻어 마신 곳이기도 하다. 이 우물의 위치가 가나안 방향에서 보면 하란을 지나쳐서 산르울파로 가는 곳에 있어서 과연 야곱이 하란에 도착해서 라헬을 만난 그 우물인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하란에서 자리를 잡은 나홀은 자기만의 성을 구축했다.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던 아브라함의 종은 하란성이 아닌 나홀의 성(창 24:10)을 찾았다. 학자들에 따르면 나홀의 성은 가나안 방향에서 보면 하란을 지나 산르울파 쪽 발리강의 상류 동쪽에 위치하였다. 이 우물이 야곱의 우물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우물에 이르기 전 하란성 주변에는 양들이 수태할 때 야곱이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하여 활용한 버드나무가 긴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창세기의 내용을 간접 증언하고 있다.

서광호 기자  seojac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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