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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전도사 68주기 추모예배에 즈음하여이야기로 풀어 쓴 문준경(3)
  • 정원영 목사
  • 승인 2018.11.08 07:37
  • 호수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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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혼과 사랑 

“아가야! 아범이 이번 달에는 언제 온다고 했다냐? 내 이번에 오믄 목포 그만 가고 인자 중동리로 들어와 살라고 할란다 그랑께 염려 말 그라” “아니 어라요 아부지 아마도 임자도에서 일을 해 볼라고 목포 일을 그랗게 신경을 쓰고 있당께 라요, 내는 괜찮어라요, 그러지 마셔라요.” 준경은 증동리 시댁에서 시부모님들을 모시며 살았다. 한 달에 하루 이틀 겨우 들리는 남편을 한없이 그리워하며 외로움 속에 있어야 했다. “아가야! 그라지 말고 느 남편 없는 날에는 내하고 글공부 하자, 내가 가르켜주마.” “아부지, 언문 말이어라. 아따 정말로 저한테 글을 가르켜 주실라구요.” 어려서부터 배우고 싶었던 언문을 문준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오히려 배울 수 있었습니다. ”아부지, 내가 편지를 썼어라, 답장이 왔는디 다음 달 초에는 꼭 온다고 했어라.“ 이렇게 남편과의 만남을 가끔씩 가지며 준경은 4-5년을 지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녀가 생기지를 않았습니다.  

정근택은 집에 올 때 마다 외로워하는 아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습니다. 점점 가지 말라고 붙잡는 아내를 뿌리치기도 어려웠습니다. “목포 안 가시믄 안돼남유, 꼭 가셔야 하믄 내도 데리고 갈순 없는감유. 임자도 일이 중헌게 준비하시느라 그러는 줄은 내도 알지만 그래도…….” “부인! 미안하여! 당신 맘 모르는 건 아닌디……, 몇 해만 좀 참아 주시요. 내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그라요. 부인! 미안허오.” 하지만 이런 말로 더 이상 부인을 온전히 위로해 줄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아기를 갖고 싶어 하는 아내의 마음을 어떻게든 어루만져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근택은 결단을 합니다. 물론 아내를 이대로 두면 안된고 또한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강권도 있었습니다. “니가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왜 객지를 오감시롱 아그를 외롭게 하냐잉, 더는 못 보것다. 일 작파허고 당장에 들어오그라.” 그래서 정근택은 목포 선구점(船具店)일을 그만두고 본가로 들어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꿈만 같은 신혼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글도 함께 읽고 증도의 아름다운 이 곳 저곳을 다니며 사랑의 밀애도 나누었습니다. 업어주고 안아주고 그야말로 아내를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이가 들어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처음 한 두 해는 그러려니 했지만 정작 10년이 가까워지고 보니 문준경은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 어르신들은 혹 시가에서 생활해서 그런가 하고 분가를 계획합니다. 그리고 증동리에서 걸어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등선마을에 집과 논3마지기 밭 6마지기를 물려주고 분가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어간에 시 어르신 정운기씨가 별세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준경은 장례를 마친 후 분가한 집에 돌아가지 않습니다. 시아버지의 묘에 움막을 치고 3년상을 치루겠다며 본가 쪽에 남아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자신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니 새사람을 얻어 자녀를 얻도록 종용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내를 사랑했던 정근택은 그렇 수 없다며 거부합니다. “인자 내는 지가 얼라를 가질 수 없는 몸이란 걸 알았어라. 그랑게 작은 사람을 얻어야 것소,” “부인! 무슨 말이오, 내는 당신밖에 없소, 그런 말 마소,” “내는 아부지 묘 옆에서 천막을 치고 삼년상을 치룰랑게 당신은 날 잊어 불고 새 사람을 얻으쇼잉.” 준경의 이런 종용에도 근택은 그럴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오히려 자기도 움막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뭔 말이라요. 움막에서 둘이 같이 지내믄 그것이 남사스러울(부끄러울) 일밖에 더 되것소, 그랑게 암말 말고 당신은 집에 있음시롱 새사람을 얻으시요잉.” 이렇게 옥신각신하며 1년여가 흘러갑니다. 
그러나 남편 정근택은 둘째 부인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의 묘를 지키고 있어 다른 도리도 없었습니다. 

이때 일본 선구점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임자도를 중심으로 한 민어 파시의 중계상을 정근택이 전적으로 맡아주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정근택의 근면 성실함을 높이 보았던 선구점 사장이 그를 후원한 것입니다. 정근택도 임자도 민어파시에서 일을 맡아 보고 싶었던 지라 목포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신혼 초 문준경이 외로움을 견디며 참아준 덕이었습니다. 임자도에서 정근택은 크게 성공하여 후에 정씨 가문만이 아니라 문준경의 복음사역에도 영향을 미쳐줄 수 게 됩니다. “남편이 임자도에서 대단했어, 문전도사님이 임자도에서 교회를 시작했는데 무시할 수 없었당게.” 하나님께서 조성해주시는 정지 작업이었을까요? 그분의 섭리는 항상 우리가 가히 알 수 없는 오묘함이었으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정원영 목사  seojac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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