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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준경전도사 68주기 추모예배에 즈음하여이야기로 풀어 쓴 문준경(2)
  • 정원영 목사
  • 승인 2018.10.19 17:25
  • 호수 423
  • 댓글 0

2. 출생과 결혼 배경
                        정원영 목사(문준경 전도사 문중 4대손, 서울서지방 제일교회 담임)
“애야! 목포에 가면 엄청 큰 배들이 있는 디 일본이란 디서 온다고 하드라만. 민어고기 알제, 민어고기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배 인디 무쇠로 된 배라고 하더라” 어린 준경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여? 배를 무쇠로 맹근다고야, 그게 참말인겨? 아따 그거 한번 봤음은 좋겠다 잉”, 어린 준경의 마음은 목포, 아니 그 너머의 세상으로 이미 향해 있었다. 
“아부지! 지도 글 배우고 싶어 라오, 우째 오빠들만 배운 다요, 내도 목포 나가서 핵교 댕기문 안되것서라오?” 꿈 많은 준경의 마음은 이미 섬에서 나와 넓은 세상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지만 당시 여성이라는 울타리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절벽이었다.  
문준경은 1882년 신안군 남쪽바다에 위치한 섬마을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 씨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과 형제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배움의 과정에서 소외된 여자아이로, 여인으로서의 삶만을 살아야 했다. 담장 너머의 세상은 동경의 대상일 뿐 집안은 다복하고 부유했다. 가까운 일가인 문재철은 암태면 땅의 2/3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쌀 오 만석을 가지고 있어 조선 5대 재벌에 든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큰 부자였다. 
문재철은 목포항이 개항된 이후 어선과 상선에 물건을 대주는 일도 했으며 목포의 명문인 문태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농, 공. 상 모든 분야에서 목포뿐 아니라 전라남도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후에는 임시정부를 돕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민족을 위한 일에도 크게 힘쓴 바가 있다. 하지만 암태면의 소작인들과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한 인물이였다. 이런 가정 배경 속에서 문준경은 목포를 오가는 아버지와 일가친척들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품고 함게하려고 노력했지만 새로운 세계는 동경의 대상일 뿐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한편 문준경은 집안의 주선으로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정택근이라는 사람이었다. 청년 정근택은 신안군 서북쪽 바다에 위치한 증도면을 중심으로 정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조 송강(松江)정철의 후예로 충북 진천면의 집성촌에서 1800년대 초에 서해안 증도에 이주하였고 비교적 부유한 양반가였다. 일찍 정근택은 섬에서 나와 목포항에 있는 일본인의 선구점에서  어선과 상선의 용품을 판매하며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 상인들로부터 거래 방법 등을 배웠다. 
정근택은 후에 임자도 민어고기 파시(바다위에서 이루어지는 생선시장)의 중계상이 되는 준비를 차분하게 해 나간다. 그리고 그 성실함과 정직함이 일본인 경영주에게 인정받아 도움을 많이 받게 되고 후에 민어고기 파시에서 크게 성공하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정근택은 당시 목포에서 주요 인사였던 문재철과 문씨일가를 만나게 되고 문준경과의 정혼이 양가 사이에서 이루어지게 됐다. 
꽃다운 나이에 문준경은 남편 될 사람이 목포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생겼고 답답한 섬을 탈출해서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 혼인날만을 기다렸다. 친구들은 “니는 좋것다야, 니 남편 될 사람은 인물이 훤하다고 하더라 야”라며 부러워했고, 어른들이 맺어준 혼인 이었지만 시샘하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가슴에 숨기며 손꼽아 혼인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문준경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 됐다. 결혼 후에 남편 정근택이 막내아들이라 직장이 있는 목포로 당연히 분가할 줄 알았는데, 남편은 직장이 있는 목포에 신혼집을 마련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증도면 중동리에서 시 어르신들을 모시고 생활하게 되었다. 암태면 문씨와 증도면 정씨의 두 가문사이에서의 결혼은 결혼을 했다고 두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호락호락한 집안의 만남이 아니었다. 
등선리 문준경의 바로 윗집에서 살았던 정씨 집안의 며느리 성장금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두 집안 어른들이 예의를 갖추어 정식으로 혼인을 안했소? 우리 집안의 전통은 장남이 아니라도 결혼하면 시가에서 먼저 몇 년은 시부모와 살다가 재금(분가)를 내는 것이라서 목포가 아니라 증도면으로 들어 왔당께.”라며 분가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문준경의 남편이 목포에서 일을 함시롱 한 달에 두 세 번 밖에 못 왔어도 얼마나 서로를 위하고 부부사이가 정말 좋다는 말을 많이 들었당께. 그라고 시부모를 얼마나 잘 모시고 섬겼든지 동네에서 며느리 잘 얻었다고 칭찬이 자자 했당께요. 정근택이네 하나씨도 암태면 문씨 집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더 잘 살게 할라고 참 노력을 많이 했지만, 정근택은 목포에 있는 직장 일을 더 신경 쓰다 본께 집에는 자주 못 왔제, 그라고 두 분 다 자녀가 생기기를 소원하고 바랬지만 목포에 많이 댕기게 되어 자녀가 안 생기더만, 그랑께 정근택이 하나씨가 혼인하고 5년 쯤 지났을까 일을 정리해 불고 증도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 

정원영 목사  seojac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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