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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교육신학사상의 역사적 배경④지상중계 / 코메니우스연구소·기독교학술원,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 (4)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8.10.05 15:10
  • 호수 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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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이러한 믿음, 사랑 가운데 참된 소망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소망은 기독인의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표를 밝혀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 때문에 이러한 소망은 다가올 그리스도의 재림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보았으며, 바로 이 3가지 믿음, 사랑, 소망을 하나님과 기독인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사역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필수적인 책임사역은 교회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성례의 집행이었다.

루카스는 교회의 사역에서 이러한 본질적인 것과 필수적인 것을 구분하여 줌으로써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신학을 특징 짓는 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루카스의 관점은 형제연합 교회에 성경과 교회를 이해하는 일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성경 속에서 본질적인 것과 필수적인 것을 구분함으로 ‘정경 속의 정경’(Kanon im Kanon)인 ‘믿음, 소망, 사랑’의 복음의 본질적인 가치를 일깨울 뿐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이 본질적인 것에서 언제나 하나가 될 수 있는 연합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1517년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고, 1519년에 이르러 먼저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인 얀후스의 가르침을 복음적인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루터는 후스파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 하였으며, 또한 보헤미아지역에서 많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반대로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의 감독인 루카스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입장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과 함께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는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에 관여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루터와 루카스)은 서로 만나 신학적인 대화를 통하여 서로에게 조언하게 되었다.

루터는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가 취하였던 제세례, 성직자의 독신생활,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일곱 가지 성례들을 따르고 있음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형제연합교회는 루터가 지적한 것들에 대하여 비판을 수용하고 폐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제시한 성만찬의 신학, 특히 육체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찬 시에 그 만찬에 함께 한다는 공재설에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제연합교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로마가톨릭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면서, 성찬에 함께 하시는 분은 영으로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라는 성경적 관점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카스의 성찬이해는 이미 칼빈의 것과 일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성만찬론과 교회의 훈육과 교회규율의 강조 때문에 오히려 “칼빈 이전의 칼빈주의자”로까지 평가되기도 하였다.

형제연합교회의 지도자인 루카스가 죽은 후, 얀 아우구스타(J.Augusta:1572 사망)가 장로로 선출 되었는데, 그는 신학자이자, 뛰어난 설교가로 형제연합교회를 이끌었다. 1542년 그가 비텐베르그의 루터를 방문하였고, 역시 루터와도 깊이 교제하는 관계를 견지하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타는 1532~33년에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만들 때, 루터가 만들었던 아욱스부르그 신조의 도움으로 유사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루터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고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여 인쇄하도록 도와주었고, 또한 서문에서 추천하는 글을 직접 써주기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제연합교회의 루터와의 관계는 루터와 멜란히톤이 죽은 이후에 유감스럽게도 악화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강한 종파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루터파 추종자들과의 교제 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독일의 루터교회는 전체 유럽의 프로테스탄트가 연합하여 함께 발전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공동관 심사보다는 그들 자신의 교회안전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이 조약에서 명시된‘Cuius regio, eius religio“란 문구 때문이다. 이 말은 ’통치자의 영토에는 통치자의 종교가‘란 말인데, 그 뜻은 영주와 고위 성직자들이 선택하는 자신의 종교에 따라 그의 영토 내에 있는 백성들은 그 종교를 따라야 하는 종교선택의 권한이 통치자에게 주어진 것을 뜻하였다. 즉 백성들은 그의 영주가 선택한 종교를 따라야 하는 의무를 규정해 준 것이다.

이러한 평화조약(화의)으로 결국 루터파가 로마가톨릭과 동등한 종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고, 루터파 교회만 평화와 안전을 가톨릭으로부터 보장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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