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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알리고 싶은 순교자 이야기(3)납북자 김유연 목사 (1901 ~ 1950)
  • 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
  • 승인 2018.01.10 18:52
  • 호수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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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물같이 흐르다가 간 선비 목사 김유연 목사는 1901년 황해도 옹진군 용연 갯마을에서 김원식 씨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양정학원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2년 젊은 나이에 동명학원을 설립해 친히 육영사업에 힘썼다. 일제의 집요한 탄압으로 인해 1924년 서울로 올라와 동아일보 경성지국을 경영하던 중 아현동 고개를 오르다가 바람에 날아오는 전도지를 집어보고, 마음에 강한 자극을 받아 교회에 출석하게 된다. 1930년 김유연은 교회출석 2년 만에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재학중이던 1931년, 만리현 고갯길에서 노방전도를 하면서 사재를 털어 만리현 교회를 개척했고 졸업 후 1934년도에는 안성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8년 말에는 압록강변 신의주 동부교회 이성봉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큰 교회로 성장시켰다. 여기에서 그의 목회 활동은 절정을 이루게 된다. 1941년 한국성결교회의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무교정교회(현 중앙성결교회)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일제는 선교사들을 강제 출국시키고 교파 구분을 없앤 후 조선기독교를 만들려고 하던 때였다.

김유연 목사는 무교정교회 부임 1개월 만에 일제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는 사상범으로 본정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구금당하게 되었다. 6개월 동안 잔인한 고문을 견디고 출옥했을 때에는 이미 무교정교회의 문은 못질되어 폐쇄된 후였다. 김 목사는 일제가 서울 거주민들을 내쫓아, 평택군 안중읍 밤바위라는 시골 마을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었는데, 영양실조로 딸이 죽는 등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1945년 해방 후 서울로 올라온 김유연 목사는 일본의 군수공장으로 사용되던 무교정교회를 되찾고 교단복구와 신학교 개교를 위해 불철주야 뛰었다. 1945년 11월 성결교 재건총회에서 부의장에 당선된 김 목사는 신학교 교수로 출강하면서 신덕교회를 개척하는 등 교수로서, 설교가로서, 문인으로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화해자로 평가를 받았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아들과 사위, 교회 전도사까지 모두 피난시키면서도 자신은 교회의 종을 울리며 강단을 지키다가 8월 12일 사택을 점령한 공산군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 납북 당했다. 이와 같이 김유연 목사는 목회자로서, 교수로서, 탁월한 설교가로서, 또한 문인으로서 한국 교계에 큰 기여와 본을 보여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김 목사의 유족으로는 찬송가공회 총무직을 오랫동안 수행한 장남 김성호목사, 북한 선교 단체에서 사역하는 김경수 목사가 있으며 이들을 비롯한 모든 후손들이 하나님의 사명지에서 선한 열매를 맺고 있다.

김헌곤 목사(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 관장)  webmaster@n491.ndsof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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